나는 모퉁이를 다시 돌아 나왔다. 여전히 인적은 없었고 회백색 벽 위의 붉은 글씨들만이 눈을 어지럽혔다. 한참을 헤맨 끝에 겨우 작은 구멍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주인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텔레비전에선 「가족오락관」이 나오고 있었다. 아저씨는 텔레비전을 보며 낄낄대느라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귀마개를 한 출연자들이 앞사람의 입모양만 보고 단어를 알아맞히는 게임이었다. 전달해야 할 단어는 ‘전전긍긍’이었다. 그 단어가 왜 기억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때 전전긍긍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으니까. 어쨌든 젊은 여자 출연자가 자꾸만 엉뚱한 단어를 얘기해서 방청객과 가게 아저씨의 웃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결국 주어진 시간이 종료됐고 여자 팀은 그 문제를 놓쳤다. 아저씨도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나는 다시,
—아저씨.
하고 불렀다.
—응?
아저씨가 고개를 돌렸고 나는,
—골목에 누가 쓰러져 있어요.
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그러니?
라고 대수롭잖게 대꾸하곤 자세를 추슬렀다. 텔레비전에선 역전이 가능한 점수 높은 문제를 걸고 양 팀이 대결하려는 참이었다.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요.
나는 매대에 가지런히 진열된 캐러멜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네, 그래요.
그제야 아저씨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무서운 얘기를 참 태연히도 하는구나. 거짓말하면 못쓰는 거야.
나는 한동안 아저씨를 설득할 말을 찾느라 침묵했다. 하지만 어린 나는 아는 단어도 별로 없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했던 말보다 더 진짜 같은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죽을지도 몰라요.
했던 말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